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 (문단 편집) == 살해 방법 == 피해자들은 대부분 [[보도연맹]]원으로서, 보도연맹에 가입할 당시 이름과 주소까지 기재했기 때문에 손 쉬운 표적이 되었다. 피해자 대부분은 집에 있다가 군경에 의해 [[경산중앙초등학교|경산중앙국민학교(현 경산중앙초등학교)]]에 끌려가 2~3일이 지난 후 머리가 깎인 채 교실에 구금되었다가 5~6일 후 코발트 [[폐광]]으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95296&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이송]]되었다. 이후 2~3명 단위로 손과 발을 철사나 밧줄로 한 데 엮고[* 이는 탄약을 아끼고 집행의 간편화를 위해, 세계대전 및 동 시기 [[보도연맹]]원들을 바다 위에서 처형할 당시에도 암암리에 쓰였던 방식이다. 다만 대부분 떨어지면 자연스럽게 [[익사]]가 되는 깊은 강가, 바다 위에서만 했으며, 돌이나 무게추를 함께 엮은 뒤 던지기도 했다.] 백자산 산 중턱의 수직 50m나 되는 수직 갱도 앞에 세운다. 그리고는 앞에서 밀어서 혹은 갱도 쪽 사람에게 총격을 가해 사망하거나 부상 당해 중심을 잃고 수직 갱도로 기울어지면 그 무게로 인해 함께 엮인 사람들도 덩달아 갱도 밑으로 끌려 떨어졌다. 쉽게 말하자면 수직으로 파내려간 갱도 입구에 사람들을 줄줄이 묶어놓고 그대로 밀어 넘어뜨리거나, 앞의 몇 명만 총으로 쏘면 묶인 줄에 의해 나머지 사람들도 떨어지도록 하였다. 게다가 일부 인원이 살아남을 가능성에 대비해 갱도 밑으로 총격을 가하거나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르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발굴 과정에서 터지지 않은 76mm 고폭탄까지 발견된 걸로 보아 폭약까지 사용한 걸로 보인다.[* 육해공(해병대는 해군 산하라서 독립된 정보부대가 없다.) 정보부대 중 이 사건에 당시 육군본부 지구정보파견대 CIC 소속(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이었던 22헌병대도 연루된 걸 보아, 사용된 무기류는 최대로 [[S&W M10|38구경 리볼버]], [[M1919 브라우닝]], [[M1911]], [[M1 카빈]], [[M1 개런드]], [[소이탄]], MK2 파인애플형 파편 수류탄 등, 혹은 기타 대검류 등으로 추정된다. '''시체를 태우려는데 소이탄을 안 썼을 리가 없으며, 그 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 기관총을 사용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그러므로 '''최대로 사용한 무기종은 8종으로 추정'''되는데, 얼마나 많은 방식으로 잔인하게 죽였는지... 이후에도 미스터리인 아픈 [[흑역사]]의 일면으로 남은 채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끔찍한 생지옥에서 [[https://blog.daum.net/jooricomhaha/993|살아남은 사람]][* [[https://ethnoscopes.blogspot.com/2015/10/gyeongsan-cobalt-mine-civilian-massacre.html|현지 소문]]에 따르면 3명이 살았는데 첫 번째 사람은 후술하듯이 기어 나오려다 굶어 죽었고, 두 번째 사람은 도망쳤으나 다시 붙잡혔고, 세 번째 사람이 달아났다고 한다. 단, 실제 생존자는 그 도망간 한 명보다는 더 많았을 것으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95296|추정]]된다.]들은 있었으나, 일부는 삶에 대한 의지로 갱도 위로 기어 나오려다 힘이 다해 죽은 사체로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215&aid=0000177068|발견]]되기도 하였다. 규모가 작은 제2수직굴에도 사람을 몇 명 넣은 후 총으로 쏴 죽이기도 했다. 수직굴이 꽉 차자 인근의 골짜기인 대원골에 끌고 가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0124644|기사]]. 이 말고도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의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41010.010330813430001|가창골]][*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대구형무소에 끌려왔고 이후 이곳에서 죽었다.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210462|기사]].]에 있는 숲의 화약창고에도 약 3천 명의 민간인이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41010.010340818420001|희생]]된 걸로 [[http://www.pn.or.kr/news/articleView.html?idxno=13096|추정]]되는데, 이후 가창댐이 생겨서 식수원으로 쓰이고 있다. [[학살]] 이후 이 지역에는 개울이 핏빛이 되었고, 이 현상은 1년 동안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215&aid=0000177068|지속]]되었다고 한다. 사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